1910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자 이회영 일가의 여섯 형제는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났다. 이건영·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이다. 여러 대에 걸쳐 고위 관료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그대로 살았다면 부와 지위를 누릴 수 있었지만, 형제들은 독립운동을 택했다. 나라를 잃은 뒤에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길과 모든 것을 걸고 독립을 되찾으려는 길은 달랐다.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분 차별을 넘어서는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졌고,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과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07년 신민회 활동에 참여했고,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는 계획을 추진했다. 나라를 되찾으려면 뜻을 함께할 사람과 그들을 훈련할 장소가 필요했다. 형제들의 만주행은 그 준비의 일부였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형제들은 집안의 재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이주했다. 이석영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내놓았고, 형제들은 이상룡 등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운영에 참여했다.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교육기관은 독립군 간부를 기르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1920년 가을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이곳에서 배출된 청년들은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형제들이 내놓은 재산은 땅과 건물에 머물지 않고 독립군을 길러내는 밑천이 됐다.
형제들이 치른 대가는 컸다. 여섯 형제 가운데 광복 후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1932년 만주에서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을 추진하다 다롄에서 체포돼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이시영은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 형제들은 독립을 위해 재산과 삶의 터전을 버렸지만, 대부분 해방의 순간을 보지 못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말할 때 광복이라는 결과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할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날만을 대한민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의 의미는 어디에 놓아야 하는가. 현행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힌다. 정부 수립의 의미를 인정하는 일과 그 이전 독립운동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은 구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둘러싼 역사 해석에서도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이영훈 등 6명이 쓴 『반일종족주의』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독도, 토지조사사업, 식민지 경제 등을 다루며 기존의 역사 인식에 도전했다. 이 책이 여러 비판을 받자 저자들은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을 펴내 그 비판에 재반론하고 기존 주장을 방어했다. 이후에도 두 책의 주장과 근거를 둘러싼 비판과 검토가 이어졌다. 이 과정을 단순히 서로 다른 역사관의 대립으로만 볼 수는 없다. 어떤 주장이 제기됐는지뿐 아니라 그 주장이 비판을 받은 뒤 어떤 근거로 방어됐는지도 살펴야 한다.
역사적 통념도 검증 대상이다. 반일 감정이 강하다고 해서 모든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반대로 기존 통념을 비판한다고 해서 새로운 주장이 저절로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료와 통계, 당시의 법과 제도, 피해자의 증언을 함께 살펴야 한다.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지보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충분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식민지근대화론도 이 기준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경제와 사회 변화를 연구하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량이나 산업시설의 증가만으로 식민지배를 평가할 수는 없다. 누가 토지와 노동을 제공했고 성과를 누가 가져갔는지, 조선인이 정치적 권리와 자결권을 보장받았는지도 따져야 한다. 경제적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과 식민지배가 정당했다는 주장은 별개다.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 역시 식민지배의 현실과 독립이라는 목적을 살피지 않은 채 오늘날의 단어 하나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이회영 6형제의 선택을 돌아보면 질문은 더욱 구체적이다. 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가문의 재산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았다.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갔고, 독립운동의 인재를 길러낼 기반을 만들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후대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그들이 감수한 희생과 남긴 역사로 살펴야 한다.
1948년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일과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기억하는 일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해석할 자유도 필요하지만, 그 해석은 사료와 증거 앞에서 검증받아야 한다. 이회영 6형제는 독립을 위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들의 이름을 기념하면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축소한다면 기념의 의미부터 되물어야 한다. 역사는 어느 진영의 편에 서는가보다, 누가 무엇을 위해 희생했고 그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정직하게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다.